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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암崔勉菴과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의 사우 대산사大山祠
최면암崔勉菴과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의 사우 대산사大山祠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동행 1백년
광주 광산구 대산동 대야(大也)마을. 송정리에서 영광쪽으로 10여 km를 가다가 삼도 삼거리에서 나주쪽으로 2km 남짓 가면 오른편으로 대산동 대야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후록(後麓)에 대산사(大山祠)가 있다. 대산사는 광복 후인 1957년 창건된 사우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그에게서 사사한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1859~1931) 선생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단아한 사우 우측에는 백년 풍상을 이겨낸 산서재(山捿齋)가 꼿꼿하게 지절을 지켜온 선비의 모습처럼 서있고, 그 사이에 연못이 있으며, 전면에는 백년 노송 두 그루가 이 사우 전체를 안온하게 감싸주고 있다.
그 너머로는 병풍산과 금성산이 마주 바라보이고 나주평야가 펼쳐져 있어 한 눈에도 명당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당이 태어나 수학기를 거치는 19세기 중후반은 조선 역사의 대전환기였다.
국내 정치는 세도 정치기에서 소수 벌열 가문에 과점되는 파행이 노정되었고, 이질적인 서구 문명의 강압은 지식인들을 심각한 지적 고민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이 격변기에 조선의 지식인이자 정치세력인 선비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18세기 북학 사상에 뿌리를 둔 개화사상은 지배층의 자기 변화논리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수입 통로를 청에서 일본으로 전환하게 된다.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에 편입하자는 운동으로서 개화파가 친일파로 변신한 계기가 마련된다.
반면 재야 학인인 유림 중심의 위정척사 사상은 자기 문화보존 논리로서 제 몫을 담당한다.
유림들은 성리학적 사회 체제를 수호하면서, 서양 문명의 한계를 직시하고 도덕적 조선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려 하였다. 이것이 정통사상인 주자학을 지키기 위해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이다.
조선 선비들은 어디 있느냐
위정척사 사상은 이 지역의 거유인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로부터 시작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은 70세인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소위 두 차례의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는데 8월에 올린 제1소는 양이(洋夷)의 침범에 대해 침식을 전폐하고 병석에 누워 분연히 필을 들어 서양세력에 방어할 시무책(時務策) 여섯 가지 조목을 개진한 소위 <육조소(六條疏)>라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위정척사의 대표적인 이론적 배경을 대변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1866년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동부승지 제수를 거부하면서 상소한 척화론인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보다 한 달 정도 앞선 것이다.
노사의 위정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1846~1916)과 조성가(趙性家:1824~1904), 이최선(李最善:1825~1883), 김록휴(金錄休:1827~1899), 조의곤(趙毅坤:1832~1893), 정재규(鄭載奎:1843~1911), 김석구(金錫龜:1835~1885), 정의림(鄭義林:1815~1910),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1851~1908), 기산도(奇山度:1878~1908) 등으로 이어져 호남 한말 의병의 구국활동으로 이어지고,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은 김평묵(金平默:1819~1888), 유중교(柳重敎:1821~1893), 최익현(崔益鉉:1833~1906), 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으로 이어진다.
조선 왕조의 사양길을 걸으며 쇠미해져가는 국운의 마지막 등불을 지키려했던 재야 학인들은 개화파로 선회하는 집권층을 비판하고 한 시대의 영화를 구가한 조선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체(國體)를 지키고 선비의 자존을 지키려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선비들의 현실 인식 속에서 수당 류인석의 생애가 전개된다.
면암의 문하에 들어가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로 단묘절신(端廟節臣) 서산공(西山公) 자미(自湄)의 16세손이다. 선친은 농산공(農山公) 하영(河永)으로 광산구 본량면 동호리(東湖里) 신촌(莘村)에서 수당을 낳았다.
수당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보이는 천성에 의용(儀容)이 단중(端重)하고 영민하여 범인과 달랐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1835∼1885) 문하에서 수학했다.
공부가 무르익으면서는 면암 최익현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갖추었다. 따라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로 이어지는 위정척사 사상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한말의 거유 최익현. 그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門人)이다.
그는 계유년(1873년, 고종 10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자 곧바로 사직상소인 <사동부승지소(辭同副承旨疏)>를 올리면서 흥선대원군에게 준엄한 비판을 가한다.
이후에도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촉구했다. 이 두 건의 계유상소로 최익현은 제주도로 유배당하고 흥선대원군은 하야한다.
해배되어 돌아오는 1875년에 최익현은 전라도 장성 하사에 있는 노사 기정진을 예방하는데, 이것은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 노사의 <병인소>와 그 사상에 바탕을 둔 현실개혁 의지가 드러난 <계유상소>의 만남이었다.
최익현은 다시 이듬해 1876년(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용과 형식이 너무 과격하다 해서 그를 처벌하라는 정부 대신의 상소가 줄을 이었고, 결국 그는 흑산도에 위리안치된다. 해배된 1879년(고종 16년) 다시 전라도 장성의 노사를 방문한다. 노사와의 인연이 수당에게도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익현은 드디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진 1895년 거병하게 된다.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로 항일척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을미의병을 시초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고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최익현의 선택은 무력 항쟁이었다. 애국을 실천했고, 망국의 고통을 구국 항쟁으로 승화하였다. 타협과 굴종은 떨쳐버리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투쟁함으로써 조선 선비의 마지막 절개를 보여주었다.
의를 따라 죽기는 어렵구나
수당은 바로 이 조선 마지막 선비정신을 이어 받았다.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노구의 면암이 의병을 일으키던 10년 동안 면암과 수당은 스승과 제자의 예를 갖추고 존심명리(存心明理)의 이치로 서로를 격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당의 글이 수록된 <수당유고(睡堂遺稿)>에는 사사(師事)했던 대곡 김석구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외에 송사 기우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 등에게도 학문을 묻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이당(以堂) 정경원(鄭經源), 석전(石田) 이병수(李炳壽) 등 당대 이 고장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당유고>에는 ‘면암의 의거시에 신병(身病)으로 달려가지 못해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면암 순절(殉節) 후로는 향리산간(鄕里山間)에 멸영자정(滅影自靖)하더니, 경술국치(庚戌國恥) 후로는 민족정기를 후진들에게 전수하는 교육에 전념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단발령이 내려지자, ‘손자들의 단발을 엄금하고 일인들에 항거했다’는 구절도 엿보인다.
기유의거를 우러러 송축함(仰頌己酉義事)
亡身殉義最爲難 慷慨誓師血淚斑
雄心倡動風雲裡 壯氣彌唄宇宙間
擧旌何必龍蛇役 殲賊先從婦鷺班
毅魄丁寧如左右 試看他日洗兵還
이 한 몸 내던져 의(義)를 따라 죽기란 지극히 어려운데
의분에 복받치어 군중 앞에 맹세하니 피눈물이 얼룩지네
웅지를 품고 풍운 속에 앞장서서 감동을 일으키니
장렬한 기상 우주(宇宙) 사이에 가득 넘치네
의로운 깃발 날림이 어찌 꼭 용사(龍蛇)의
역(役)[임진왜란]뿐이리요
적을 섬멸하기 위해 원로(婦鷺)의 반열[조정에
늘어선 백관]에서 가장 먼저 앞장을 섰도다
의연한 그 충혼 정녕코 좌우에 머무시리니
후일 무기 씻고 돌아올 때를 시험 삼아 보시오
– 수당 선생(睡堂 先生) 우국시(憂國詩) <수당유고(睡堂遺稿)> 중 –
이 시는 기유의사(己酉義事) 즉,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의거를 우러러 송축한 시이다. 결구에서 광복의 날이 기어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수당은 그러나 그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만다. 선생은 국체가 사라진 망국의 한을 가슴에 묻고 산서재에 두문불출 제자 양성과 학문 도야에 정진한다.
수당은 매일 오르던 산서재 앞의 신방돌에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 새기고 선비의 길을 실천했다. 선생은 또 산서재 앞에 자기 얼굴 모습을 닮은 ‘대산수옹(大山睡翁)’ 반신 자화상을 자연석으로 세워두고 세상을 등지고 옛 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제자와 후손들에게 표현했다. 그 ‘세상에 눈 감고 조는 늙은이 상’은 그대로 수당의 마음이었다.
수당은 1931년 향년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게 된다.
선생은 자신의 묘비표제(墓碑表題)를 조선 유민(朝鮮 遺民)이라 밝혔으니, ‘망한 나라 백성’ 행의지절(行義志節)의 유교적 신념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이다.
50년 동안 후손들이 지켜온 대산사
수당 선생 사후 윤요중(尹堯重), 송흥진(宋興鎭), 김칠봉(金七峰) 등 선생의 고제(高弟)들에 의해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존심계(存心契)’가 조직되어 오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사우 건립의 사론(士論)이 일어났다.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던 어려운 시기였지만 사자(嗣子) 동렬(東烈)공의 효성과, 재기(在沂), 재연(在沇), 재항(在沆) 등 손자들의 합심으로 1957년 예성(禮成)을 보게 되었다.
주벽(主壁)에 면암 최익현, 동벽(東壁)에 수당 선생이 배향되었다. 이로써 조선유민 류인석은 유민이 아닌 영광스러운 자주민(自主民)으로 환생을 한 것이다.
<수당유고(睡堂遺稿)> 서문에서 영남(嶺南)의 거유(巨儒)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은 ‘수당의 조선 유민 정신은 백이숙제의 지절에 비유되는 것이다’라고 찬양하고 있다. 지절과 절제로 한말의 정치적 격변을 껴안은 한 사림(士林)의 생애가 잘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당의 친손인 자산 류재항 씨(76)는 “민족의 정기와 선비의 얼이 담긴 이 대산사와 수당의 유물, 유고가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한말 선비들의 기개와 절의를 배울 수 있는 도량으로 대산사가 재조명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참례한 전 전남대 송병회 교수는 “광산 지역의 살아있는 조선 말기의 우리 선조들의 유산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이 대산사를 시의 문화재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멀리 나주평야를 바라보면 저물어가는 조선의 운명을 지켜보며 유학의 정신을 꿋꿋하게 지켜나간 한 선비의 외침이, 그리고 그 스승과 함께 후세로 아름다운 역사의 동행길을 걸어간 제자와 그들을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이 곱게 저물어가고 있다.
그 저무는 석양이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의 우리 국체(國體)는 누가 자존을 지키고 있는가.
두남정기 斗南亭記
斗南亭記
八溪之東南 有月里焉, 彌堂居士 崔翁敬恕 隱居講學於其間. 月里者 介在彌泰山下 玉斗峯南, 原野平寬, 屋舍塢集, 無山水之奇, 眺望之勝, 惟二山者 前後拱, 而若궤案焉. 故居士之堂, 舊在村里閭舍間, 名以仰彌者 蓋自堂而可仰者 惟彌山已. 旣而從學諸子 病其陋且隘也. 更相地於里之南爽塏處, 築四楹之亭, 則面勢開豁, 足以攬納宏遠, 盡占一區之勝矣. 乃署其扁曰斗南, 屬余爲記. 或疑前之仰彌者 未始非斗南也, 今之斗南者 亦可以仰彌. 而何前後取舍之不一哉. 余謂不然, 觀殊境異 而名取稱焉. 前之名堂 約而偏者也.
今之名亭 廣而包者也. 蓋前後之實相須, 而豈有意於取舍之哉. 雖然, 抑余因此 而有所感矣.
凡人之取其地 而名堂室者 非徒因其名地偶爾, 蓋有取於其性情氣象之相近者 而寓思焉. 如仁智之 樂山水者 是也.
今夫彌泰玉斗二山者 皆八溪之望, 而其氣象 則有不同焉. 彌泰之岩岩萬丈, 截孼難犯 則有似乎 特立之士 獨行而不顧者也. 玉斗之秀麗雙峰亭亭聳出 則有似乎 高人逸士 소然於物表者也. 善觀者觀於此, 而有取焉, 則亦足以資立身 酬世之方, 而二者亦未嘗不相資也.
余觀居士 自少飭躬구經 淸介自守, 不亂於邪世 則蓋有得於仰彌者 然矣. 而今老矣. 自適於山林煙霞之間 而비예塵애 若有慕於逸士之風者 則斗南之取得 無頻之然乎. 不然, 彌之仰而南於斗者 居是間之所同 而獨居士與斯亭也哉.
昔石守道 隱居조徠之間 而卒之名動一世 則歐陽公稱之 曰조徠之岩岩與惟子之德 魯人之所瞻 蓋美其人與山之相符也. 安知今之不如昔耶 亦在乎勉焉而已. 故余爲之廣其義如此
歲甲申仲秋花山權龍鉉記
두남정기
초계의 동남쪽에 월막리가 있으니, 미당 거사 최경서 옹이 살면서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은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있다.
넓은 들 가운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산수의 기이함과 바라 볼만 한 경치는 없고,
오직 두 산이 앞과 뒤에서 양손으로 껴안아 마치 책상 모양이다.
처음에는 거사의 당(堂)이 동네 가운데 있었고, 앙미당(仰彌堂 : 미태산을 우러러보는 집)이라고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당(堂)으로부터 높이 보이는 것이 미태산 뿐이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따르며 배우는 여러 제자들이 그 누추하고 좁은 것을 염려하여 다시 마을 남쪽, 앞이 탁 트인 밝은 곳에 땅을 가려, 네 개의 기둥이 우뚝 선 정자를 지었다.
그 면모가 열리고 확 트여서, 넓고 먼 곳을 잡아드렸으니, 한 구역의 빼어난 명당이다. 곧 정자 이름을 두남정(斗南亭 : 옥두봉 남쪽에 있는 정자)이라 짓고 나에게 쓸 것을 부탁했다.
어떤 사람이 “전의 앙미당과 지금의 두남정이 옥두봉과 미태산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으니, 지금의 ‘두남정’을 또한 ‘앙미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찌 전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취하여 한결같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 옥두봉의 경계가 빼어나게 다른 것을 보고 이름을 얻어서 부른 것이다. 전의 이름인 앙미당(仰彌堂)은 간략하고 치우쳐 미태산만 보이고, 옥두봉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앙미당이라 하였지만 지금의 두남정(斗南亭)은 앞뒤가 확 트여 미태산과 옥두봉을 다 안아서 볼 수 있고 옥두봉 남쪽에 있으니, 옥두봉의 남쪽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두남정”을 지었다. 고로 앞에 붙인 앙미당(仰彌堂)과 뒤에 지은 두남정(斗南亭)의 이름이 상황에 딱 맞아, 버리고 취함에 뜻이 있지 않는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로 인하여 느낀 것이 있다. 무릇 사람이 그 땅을 취하여 당(堂)이나 실(室)을 붙이는 것은 다만 그 이름과 땅에 어울리게 할뿐만 아니라,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의 성품이나 기상에 맞는 것을 취하여 뜻을 붙여 두는 것이니, 마치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이것이라.
지금 저 미태산과 옥두봉은 모두 초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지만, 그 기상은 같지 않다.
미태산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고 위엄이 있어 범하기 어려우니, 곧 빼어난 선비가 홀로 가면서 돌아보지 않는 것과 유사하고, 옥두봉은 수려한 쌍봉이 아름답고 예쁘게 우뚝 솟았으니, 마치 덕이 높은 선비가 속세를 떠나 유연히 가는 풍모와 유사하다. 잘 보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면, 몸을 세워 세상에 베풂에 도움이 되니. 이 두 산은 일찍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거사를 봄에, 어려서부터 몸을 삼가고, 공부에 힘써, 청렴결백하게 스스로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니, 미태산을 보고 깨쳐 얻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늙어 스스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보는 것이 마치 덕이 높은 선비의 풍모(高人逸士=玉斗峯)가 연상되니, 앙미당 보다는 두남정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미태산과 옥두봉 사이에 그대와 이 정자가 있어 우러름을 받을 것이다.
옛날 송나라 때 석수도가 조래산 사이에 은거하였는데, 죽음에 이르러 이름이 일세에 진동하니, 구양수가 그를 칭하기를 “조래산의 뛰어남과 그대의 덕은 노나라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과 산이 서로 부합한 것을 칭찬한 것이다.
거사도 아마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어찌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힘씀에 있을 뿐이라. 고로 내가 이를 위해서 그 뜻을 넓히기를 이와 같이 한다.
1944년 봄 화산 권용현 씀.